다빈치에게 묻다:
융합은 목표가 아닌 과정
원광연 KAIST 명예교수
나와 내 아내는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좁고 긴 통로를 따라 공항 입국심사대로 향했다. 같은 비행기로 도착한 몇 안 되는 탑승객들도 굳은 표정으로 같은 방향으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이곳 공항은 민간 여행객보다 무장한 군인들이 더 많은 듯했다.
이곳에 도착 직전 적대국인 아랍 국가를 방문했던 터라, 혹시나 입국을 거부당하든지 꼬치꼬치 캐물으면 뭐라고 답변해야 하나 마음속으로 이런저런 시나리오에 대응책을 마련해두긴 했지만, 예측하지 못한 돌발상황은 해외여행을 하다 보면 항상 일어나기 마련이다.
대국으로 둘러싸인 나라. 천연자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나라. 아니 국토 대부분은 농경작이 불가능하고 사람이 거주하기도 어려운 황무지인 나라. 그러나 오히려 이런 상황을 전화위복으로 삼고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경제 도약을 이룬 나라. 꼭 와보고 싶었지만 그동안 올 일도 없었고 위험할 것 같아서 올 엄두를 내지 못했던 나라. 이스라엘.
나의 걱정과는 다르게 입국심사는 아주 쉽고 편하게 진행되었다. 여권에 이스라엘 방문 흔적이 남으면 혹시 다른 나라 입국이 어려울지 모르니 백지 조각에 입국 스탬프를 찍어 주겠다면서, 목적지와 체류 기간만 간단히 묻고 이스라엘에 머무는 동안 좋은 추억을 만들고 가라는 따듯한 말에 용기를 가지고 이스라엘 땅에 첫발을 내렸다.
이제 일주일간 렌터카로 이스라엘 땅,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팔레스타인 땅을 답사할 계획이다. 이 여행을 하게 된 동기는 매우 특별하였다. 국내 교육계에도 잘 알려진 이스라엘 최고의 영재고등학교이면서 융합교육의 선두 주자, <이스라엘 과학예술고등학교(Israel Arts and Science Academy)>를 방문하고 이곳 교사들과 학생들과 면담을 하기로 되어있다.
예루살렘 교외에 자리 잡은 이 고등학교는 자동차 내비게이터에도 잘 잡히지 않아 찾아가는 데 조금 애를 먹었다. 길을 막고 행선지를 확인하는 바리케이드를 두어 개 지나, 육중한 철문과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학교 캠퍼스는 외부에서는 알아보기조차 힘들었다. 그래봤자 학교인데 뭐 이렇게까지 보안을 하나? 조금 불편한 심기를 감추고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하긴 유럽이나 미국 같은 나라들은 학교 캠퍼스라 할 것도 없이 개방되어 있는 반면, 이곳 이스라엘처럼 학교 캠퍼스를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한 곳도 꽤 있다. 예전 멕시코의 한 대학교를 방문했을 때도 사전에 허가를 받고 캠퍼스 정문에서 확인 후에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이스라엘 과학예술고등학교(Israel Arts and Science Academy)
마침 여름방학 기간이어서 일상적인 학생들의 활동과 수업을 자연스럽게 참관할 수는 없었지만, 사전에 준비된 학생대표들과의 미팅과 교사들의 안내로 이곳의 상황을 피상적이나마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3시간에 걸친 방문을 마치고 학교를 나와 예루살렘 시내를 향하면서 여기 와서 느낀 소감을 마음 속으로 정리해보았다.
- 건물, 시설, 장비 등 하드웨어는 우리 과학고등학교만 못하다. 교과과정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 학교의 공식 명칭은 분명히 '과학예술 고등학교'로 명시되어 있지만, 여기서 '예술'은 미술이나 음악을 의미하는 통상적인 예술이라기보다는 '인문교양(liberal arts)'의 성격이 더 두드러진다. 물론 일반 고등학교에 비해 미술이나 음악을 포함한 예술 교육도 일반고와는 달리 비중 있게 실시된다.
- 숙제가 아예 없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니, 방과 후의 생활은 기숙사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숙제에 들이는 시간보다는 혼자서 독서하거나 사색할 시간, 학생들끼리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훨씬 소중하다고 본다.
- 일주일 중 하루 오후 시간은 지역봉사에 할애한다. 학교 부근에 거주하는 노약자, 소수자 등 도움을 필요로 하는 주민들을 찾아가 봉사활동을 한다. 나 자신이 곧 내가 속한 지역, 민족, 국가의 일부라는 것을 항상 자각시킨다.
그러나 당시에도 조그만 충격이었고 여태까지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학생들의 자랑스러운 활약상이 포스터 형태로 게시되어 있는 긴 복도를 걸으면서 나를 안내하는 교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포스터를 보니 학생들이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방금 본 포스터에는 여름방학 동안 미국 NASA에서 활동한 학생의 경험담이 있더군요. 이곳을 졸업한 학생들은 대략 어떤 진로를 택하나요?"
예상했던 답변이 돌아왔다. 대부분 세계 최고의 대학교로 진학하고 대학이나 대학원을 마친 후에는 유명 연구기관 연구원, 벤처 창업가, 정부 공직자, 대학교수, 의사 등의 커리어를 택한다고. 뭐, 우리나라와 크게 다를 것 없다. 그런데 마지막 한 마디.
"그런데 가장 우수한 졸업생들이 우리 고등학교에 교사로 다시 돌아오는 사례가 꽤 됩니다. 가장 보람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아! 얼마나 멋진가? 자신들이 배운 것을 후배들에게 전수하고, 자신들이 받은 것을 후배들과 공유한다. 이것을 최고의 보람으로 여긴단다.
요즘, 아니,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우리나라 초중고 교육의 최대 화두는 융합,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스팀교육(STEAM Education)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미래사회는 이질적인 분야, 이를테면 과학과 예술, 과학과 인문학,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등의 경계를 허물고 양극단의 전문지식과 노하우를 합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사회가 될 것이고, 이런 사회에 대비해서 언뜻 관련 없이 보이는 분야들을 융합하는 능력을 조기 배양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물론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여러 멋진 사례들도 소개된다.
나도 대학교수로서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것이 주 업무이지만, 가끔 초중고교에서 강의 요청이 오곤 한다. 그리고 그런 요청은 십중팔구, 아니 백 퍼센트 융합교육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는 것이다.
교육 현장에서는 융합교육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융합교육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고, 별도의 정형화된 교육 커리큘럼이나 교안과 교재도 마땅치 않고, 융합교육을 담당하는 융합 전문 교사도 부족하단다. 이런 상황에 내가 융합교육에 차출된 배경은 간단하다.
대학교 전공으로 물리학, 대학원에서는 인공지능, 미국 대학교 교수 시절에는 로봇공학, 귀국 후 KAIST에서는 가상현실(최근엔 메타버스라고 부른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이공계 배경과는 동떨어진 전시기획과 공연기획을 넘나들었다. 결정적으로(?) 30여 년간 줄기차게 문화예술과 과학기술 접목의 필요성을 외쳤고, 그것을 <문화기술(Culture Technology)>이라는 명칭으로 학술적으로 체계화한 바 있다.
그러던 중, KAIST에 문화기술을 전공하는 <문화기술대학원>을 설립하고 초대원장도 지냈다. 이런 연유로 내 커리어를 한 단어로 축약하면 '융합'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가끔 나는 질문을 받는다. 어떤 계기로 이공학자가 문화예술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게 되었고, 어떤 준비과정을 거쳤는가?
융합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어떤 교육과정이 필요한가? 혹시나 그런 '외도'를 하는 과정에 불이익은 없었는가? 등등.
이럴 때 나는 그냥 미소로써 대답한다. 나는 단 한 번도 '외도'를 한 적도 없고 의도적으로 '융합'을 시도한 적도 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내 연구 관심 영역을 조금씩, 그리고 자연스럽게 넓혀가면서 깊게 들어간 것뿐이다. 이걸 설명하기도 어렵고 변명하기도 구차스러워 그냥 미소로 답할 뿐이다.
융합은 자발적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소위 '르네상스 맨'의 원조 격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회화, 조각, 건축과 같은 시각예술 영역뿐 아니라 공연기획, 무대디자인과 같은 공연예술, 그리고 아예 예술과 거리가 먼 무기 제작이나 기계설계와 같은 공학 분야, 천문학, 유체역학, 지질학과 같은 자연과학, 그리고 수학(주로 기하학). 그러고 보니 무려 시체 70여 구를 해부해서 쌓은 해부학도 빼놓을 수 없겠다. 만일 그가 살아 있다면 사람들은 그에게 어떻게 그 많은 이질적인 분야들을 두루 걸쳐 융합했는가 질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간단했을 것이다.
"융합이라니요? 나는 그런 일 한 적이 없는데요."
뭐, 나의 상상에 의한 시나리오지만 내 서가에 꽂힌 수십 권에 달하는 그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고 내린 결론이다. 이를테면, 처음에는 그림을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 신체를 몇 구 해부했을 것이다. 그래야 피부 속에 감추어진 근육 구조를 알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다 보니 인체의 내부 구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필연적으로 더 많은 시체에 손을 대었다. 그러면서 그의 지적 호기심은 인간의 보다 근본적인 이슈에 다다르게 되었다.
심장 박동의 원리는 무엇인가? 세상을 '본다'라는 행위는 세상을 '이해하는' 현상과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
마음은 어디서 생성되는가? 생명의 근원은 인체 어디에 위치하는가? 같은 이유로 그림을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 자연을 세심히 관찰하다가 지질의 변화와 유체의 흐름에 관한 연구조사로 이어졌을 것이다. 다빈치의 다른 전문성과 업적 역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에서 출발한,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지식의 확장이었을 것이다. 나의 결론은 이렇다. 지적 탐구와 논리적 사고, 냉철한 관찰과 실험은 저절로 융합이란 현상을 유발한다.
융합은 필연적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거의 대부분 복잡하다.
전통적으로 자연과학에서는 복잡한 상황을 그 핵심을 해치지 않는 만큼 단순화시키는데, 가능하면 솔루션을 구할 수 있는 정도까지 단순화시킨다. 문제는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시대를 대표하는 단어를 하나 들라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복잡성'(Complexity)을 들 것이다. 복잡한 문제를 다루는데 첫걸음은 문제에 관련된 주요 인자들을 찾아내는 일이다. 다음으로 각 인자들을 설명하는 모델이나 현상을 도출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들을 모두 수용하여 종합하는 과정, 즉 융합의 과정으로 마무리 짓게 될 것이다. 결국 세상에 대두되는 거의 모든 이슈와 문제는 융합 패러다임을 거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자. 우리나라 최초의 달 궤도 탐사선 다누리호가 지난 여름, 달을 향한 4개월 반의 긴 여정을 시작했다. 다누리호는 약 1년간 달 궤도를 돌며 여러 가지 측정과 실험을 할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 그런데 잠깐. 지구에서 달까지는 기껏해야 일주일, 빠르면 3~4일이면 갈 수 있다.
그런데 왜 몇 개월이나 돌아가는가? 여기서 궤도를 결정하는 주요 인자를 살펴보자. 무엇보다 먼저 발사체의 추진력과 탐사선의 무게가 있다.
그 다음 반드시 수행해야 할 임무들의 목록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가장 중심이 되는 물리학뿐 아니라 지질학, 천문학, 계측공학, 광학, 전자통신, 재료공학, 심지어는 우주 인터넷 기술 등 매우 다양한 분야가 개입된다.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이들 각 분야의 요구사항이 서로 배타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 달 탐사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정부 부처의 정책과 국민 정서와 같은 정량적이지 않은 요소도 고려할 수밖에 없다. 이런 다차원적이며 비선형적인 문제는 전형적인 융합적 접근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그 결과 현재와 같이 멀리 우주공간을 돌아서 가는 매우 창의적인 솔루션을 도출하게 된 것이다.
이 글에서는 비교적 간단한 달 궤도선 예를 들었지만, 다음 세대가 직면하게 될 중요한 문제들 - 생태계 보전, 기후 온난화, 에너지 고갈, 인구 증가 (우리나라는 인구 감소) - 은 융합적 마인드와 융합적 해결체계 이외에는 답이 없을 것이다.
융합은 적어도 세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흔히 융합을 이야기할 때, 분야 간의 융합을 떠올린다. 정보기술과 생명공학, 물리학과 수학, 화학공학과 나노과학, 심지어 통계학과 미디어아트 등. 물론 분야 간의 융합은 융합을 거론할 때 가장 먼저 고려되는 사항이다. 분야 간의 융합을 학문적 융합이라고 한다면, 융합에는 또 다른 융합, 즉 사회적 융합과 성향적 융합도 있다.
외국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귀국해서 맨 처음으로 시도했던 연구 프로젝트는 피아노 자율 학습을 위한 소프트웨어(앱) 개발이었다. 나처럼 성인이 되어 뒤늦게 피아노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교습학원에 가지 않고 PC에 앱을 설치하고 실행하면 인공지능 피아노 교사가 학생의 진도에 맞춰 지속적으로 흥미를 유발하면서 연주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당초 6개월이면 개발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웬걸, 2년이 걸려 완성했고, 타이밍을 놓친 제품은 상용화는 했으나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왜 실패했을까? 이 앱을 개발하기 위해 각 전문분야에서 나름대로 실력 있는 전문가들을 모셔왔으나, 문제는 그들끼리 전혀 협력이 안 되었다는 것이다. 협력은커녕, 타 분야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융합은 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배경, 서로 다른 전문성을 지닌 사람들끼리의 상호 존중과 협력은 필수이다. 이걸 '사회적 융합'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어떤 사안을 접했을 때 나는 가끔 극단적으로 혁신적일 때도 있고 혹은 정반대 보수적인 태도를 취할 때도 있어서 나 자신 당황스러웠던 경험이 여러 차례 있었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논리적-감성적 스펙트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기도 한다. 내향성-외향성, 이상추구-현실감각, 겸손-자신감, 여성성-남성성 등, 우리 인간은 인공지능이 아니기에 다차원의 성향을 지니고 있고, 이들 성향은 서로 상호 모순적일 수 있다. 여기서 최적의 결정을 하는 것은 수학적으로는 비선형적 최적화 문제(Non-linear optimization problem)을 푸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성향적 융합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융합은 메타능력이다.
이따금, 생각하지 않았던 졸업생의 방문을 받는다. 졸업 후 수년간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느닷없이 연구실을 노크한다.
내 경험으론 이 경우 십중팔구는 외국 유학을 가기 위해 학부 시절 지도교수나 본인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교수에게 추천서를 부탁하려는 것이다. 이유를 막론하고 찾아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반갑지만, 이와는 별개로 추천서는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작성해야 한다.
그런데 모든 지원 대학에서 공통적으로 문의하는 항목이 몇 개 있다. 지원자를 어떤 연유로 얼마간 알고 지내왔는가? 지원자가 우리 대학에 들어와서 성공적으로 학업을 수행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이와 더불어 지원자에 대한 세부 능력치를 작성하게 되어있다. 전공지식, 창의성, 인내성, 지구력, 인성, 커뮤니케이션 능력, 논문작성 능력, 영어 구사 능력, 등등. 그런데 이 항목 어디에도 융합능력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글쎄, 내 견해로, 융합능력은 다른 개별 능력처럼 한 개의 잣대로는 측정하기 불가능한 복합적인 능력이기 때문일 것이다. 융합능력은 앞서 열거한 (거의) 모든 능력들의 집합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융합능력을 일종의 '메타능력'이라고 본다.
'메타(meta)'는 알다시피 '상위' 혹은 '초월'을 의미하는 접두사로서, 융합을 설명하는데 아주 잘 들어맞는다. 그런데 융합능력을 메타능력으로 본다면 나쁜 소식이 기다린다. 융합능력을 향상시키는 지름길은 없다는 것이다.
융합은 도구이며 과정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융합은 목표나 목적이 아니다. 우리가 문제를 만들고, 문제를 정의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융합적인 태도와 사고, 융합적인 방법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물리학 분야에 수학적인 사고와 방법이 요구되는 것과 유사하다. 물론 수학과는 달리 융합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분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융합능력을 체계적으로 키우는 것은 불가능한가? 충분히 가능하다. 여기서는 구체적인 방법론보다는 기본적인 접근 방향을 제시하는 걸로 만족하자.
- 오른 쪽 뇌와 왼쪽 뇌를 균형 있게 사용하게끔 한다.
- 이왕이면 오른쪽 뇌와 왼쪽 뇌를 동시에 작동시킨다.
- 이에 더해서 물리적인 행동을 동반시킨다.
- 더 나아가서 집단적인 참여와 협동을 촉진한다.
- 앞의 1~4 항목이 교실과 수업시간이라는 특정한 시공간을 넘어 일상에서 일어나는 환경을 조성한다.
(맺음말) 여기까지는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는 어떤 세계를 맞이할 것인가? 아니, 어떤 세계를 만들어 갈 것인가?
구체적인 미래 예측은 불가능하지만, 전반적인 기술발전의 추세를 볼 때,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과 거의 맞먹거나 우월한 능력과 기능을 가진 지능 로봇이 출현할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들의 가치를 인간과 비교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인간과 기계가 공존하면서 인간성을 훼손하지 않는 사회를 실현하는 문제. 그것이 아마 궁극적인 융합 문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