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가상과 현실이 요동치는 양자 우주:
그 현장에서 빅뱅가속기 사냥꾼을 만나다
양운기 교수(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1. 바닷속 거북이와 우주 여행자
"태평양 깊은 바다 속에 살고 있는 거북이가 용왕님에게 찾아갑니다. 용왕님! 용왕님!, 오늘 학교에서 우리가 푸른 바닷속에 살고 있다고 배웠습니다. 도대체 그 푸른 바다가 어디에 있습니까?"
태어나서 한 번도 물 밖으로 나가본 적 없는 거북이는 자신이 헤엄치는 공간이 바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요? 아마 어려울 것입니다. 주변을 가득 채운 물은 너무나 당연해서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배경일 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매일 '공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고, 친구들과 춤추고 노래하는 이 모든 일은 '공간'이라는 무대 위에서 펼쳐집니다. 하지만 위의 거북이처럼 우리가 어떤 공간에 살고 있는 지, 진지하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요?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이 텅 빈 공간, 즉 진공의 비밀을 파헤치는 여행을 떠나보려고 합니다. 그 여행의 끝에서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알던 세상이 푸른 태평양 바다 더 깊고 신비로운 세계임을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2. 보이지 않는 세계: 암흑 물질

이 질문의 시작은 "나는 지금 어떤 공간에,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에서 출발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우리가 '가만히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는 우리를 태운 채 초속 약 30km라는 엄청한 속도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이는 KTX보다 300배나 빠른 속도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우리의 태양 역시 거대한 우리 은하의 중심을 축으로 초속 약 240km라는 상상하기 힘든 속도로 여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빛의 속도의 1/1000에 달하는 빠르기로,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우리 은하 안에서 이런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물리학자들은 태양 같은 별들의 회전 속도를 계산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은하의 바깥쪽으로 갈수록 별들의 회전 속도가 예측보다 훨씬 빨랐던 것입니다. 뉴턴의 운동 법칙에 따르면,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별들의 속도는 느려져야 합니다.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물리학자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며 중력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미지의 물질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암흑 물질(Dark Matter)이라고 부릅니다. 이렇듯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공간에서 우리 몸의 회전 속도만 고려하여도 이미 우리가 모르는 우주의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3. 텅 빈 공간: 요동치는 양자우주

인류의 탐험은 두 방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망원경을 통해 우주 거대 구조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미경과 가속기를 통해 물질의 가장 근본적인 구성 요소를 탐색하는 것입니다. 초거대세계와 초미시세계를 탐험하는 이 두 여정의 최전선에서 놀랍게도 하나의 질문으로 모입니다. "이 모든 것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우주의 거대한 은하 필라멘트 구조부터 우리 몸을 이루는 작은 원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결국 몇 종류의 근본 입자들로 설명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원자는 사실 그 크기의 10만 분의 1밖에 안 되는 작은 원자핵과 그 주위를 맴도는 전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들은 또다시 쿼크(quark)라는 더 근본적인 입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작은 입자들의 세계로 내려가면, 우리의 상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신비로운 세상이 펼쳐지는데, 그곳이 바로 양자 우주 (Quantum Universe)입니다. 그리고 이 양자 우주를 지배하는 통치자는 바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입자인 전자(electron)입니다.

전자는 놀라운 입자입니다. 질량이 ~10-30kg 밖에 안될 정도로 극도로 작고, 크기는 우리가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작습니다. 전자의 반경이 ~10-18m 보다 작아 거의 점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물리학자들은 심각한 문제에 부딪힙니다. 어떻게 그 작은 점 안에 음(-)의 전하가 뭉쳐있을 수 있을까요? 같은 전하끼리는 서로 밀어내는 강력한 전기적 반발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전자는 스스로 강력히 반발해서 산산조각 나야 합니다. 하지만 전자는 우주에서 가장 안정적인 입자 중 하나이자, 현대 반도체 문명의 주인공입니다. 우리는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해답은 바로 우리가 '텅 비어있다'고 믿었던 진공에 있습니다.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진공은 결코 비어있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는 물질과 반물질 (전자와 반물질인 양전자) 입자 쌍이 끊임없이 빚처럼 에너지를 빌려 '짠!'하고 나타났다가, 아주 짧은 순간에 (~10-21초 보다 작은) 서로 만나 빛으로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양자 요동(Quantum Fluctua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실재와 비실재의 경계에 있는 가상 입자(Virtual Particle)들입니다.
전자는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요동치는 가상 입자들의 바다, 즉 '가상 세계(Virtual World)'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전자의 강력한 음전하는 주변의 가상 양전자들을 끌어당기고 가상 전자들을 밀어냅니다. 그 결과 전자는 자신을 가려주는 가상 입자들의 구름에 둘러싸이게 되고, 이 '가려막기 효과'(Screening Effect) 덕분에 우리는 실제보다 약해진 전하를 측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전자는 이 요동치는 양자 진공이라는 '가상 세계'와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덕분에 '현실 세계'에서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텅 빈 공간'은 사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역동적으로 요동치는 물리적 세계인 것입니다.
4. 빅뱅가속기 사냥꾼: 사라진 반물질과 질량의 기원을 찾아서
"빛이 있으라!" 성경에만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빛(감마선)은 '쌍생성'이라는 과정을 통해 물질(전자)과 반물질(양전자) 입자 쌍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물질과 반물질이 만나면 '쌍소멸'하며 빛, 즉 순수한 에너지로 돌아갑니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공식 E=mc²가 바로 이 에너지와 질량(물질)이 서로 변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138억 년 전 빅뱅 직후의 우주는 바로 이 빛과 물질, 반물질이 서로를 생성되고 소멸하는 역동적인 춤의 무대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거대한 미스터리가 생겨납니다. 물리 법칙에 의하면 물질과 반물질은 정확히 똑같은 양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우주는 별과 생명으로 가득한 물질로만 가득차 있고, 반물질은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빅뱅 당시 물질과 반물질이 정확히 1:1로 만나 모두 빛으로 사라졌다면, 지금의 우주는 텅 빈 에너지의 바다여야 합니다. 빅뱅 이후 쌍둥이처럼 태어났던 그 많던 반물질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이 '우주 최대의 미스테리 사건'을 탐색하기 위해, 저와 같은 '빅뱅가속기 사냥꾼'들은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거대강입자가속기(LHC)로 갑니다. 우리는 LHC에서 양성자를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시켜 충돌시킴으로써, 빅뱅 직후의 뜨겁고 에너지 넘치는 상태를 아주 작은 공간에 재현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입자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지는지를 CMS와 같은 거대한 검출기로 정밀하게 관찰하며 사라진 반물질이나 암흑물질의 행방을 추적하는 단서를 찾는 것입니다.

2012년 7월 4일, 저를 포함한 전 세계 물리학자들은 환호했습니다. 바로 질량의 기원을 설명하는 '힉스 입자(Higgs Boson)'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질량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거움'이라고 생각하지만, 물리학적으로 질량은 '관성에 대한 저항'입니다. 즉, 어떤 물체를 움직이거나 멈추게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나타내는 척도입니다. 1964년에 영국의 물리학자 힉스는 온 우주가 '힉스 장(Higgs Field)'으로 균일하게 채워져 있고, 한 입자의 질량은 이러한 힉스 장과 상호작용의 결과라는 공상과학 같은 가정을 하였는 데, 50년이 지나 놀랍게도 이 가정이 사실로 증명되었습니다.
마치 끈적끈적한 꿀이 가득 찬 공간을 상상해 보세요. 그곳을 지나는 입자들은 저항을 받게 됩니다. 이 '저항'이 바로 질량입니다. 힉스 장과 강하게 상호작용하는 입자(탑 쿼크 등)는 큰 질량을 갖고, 약하게 상호작용하는 입자(전자 등)는 작은 질량을 갖습니다. 그리고 힉스 장과 전혀 상호작용하지 않는 입자인 '광자(Photon)'는 질량이 0이 되어 빛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양자역학적 경이로움이 나타납니다. 물질과 반물질이 요동치는 양자우주의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힉스 입자는 때때로 질량이 전혀 없는 광자 두 개로 붕괴합니다. 어떻게 무거운 입자가 가벼운 것도 아닌 '질량 0'인 입자로 변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다시 한번 양자우주에서 '가상 세계'가 등장합니다. 힉스 입자는 붕괴하는 아주 짧은 순간, 진공의 양자 요동 속에서 가장 무거운 가상 입자인 탑 쿼크와 반 탑 쿼크 쌍을 잠시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이 가상 쿼크 쌍이 서로 소멸하면서 두 개의 광자를 내놓는 것입니다. 즉, 가상 세계의 양자 요동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현상입니다. 이는 가상 세계가 단순히 수학적 개념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현상을 지배하는 실재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5. 끝나지 않은 탐험, 그리고 남겨진 질문들
우리는 양자 우주의 문을 이제 막 열기 시작했습니다. 텅 빈 줄 알았던 진공은 사실 태평양의 푸른 바다보다 더 진한 물질과 반물질이 요동치는 가상의 바다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물질의 존재는 이 가상의 바다와의 상호작용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닷속 거북이가 바다의 끝을 알 수 없듯이, 우리 앞에는 여전히 거대한 질문들이 남아있습니다. 우리 은하를 붙잡고 있는 암흑 물질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우주를 가속 팽창시키는 암흑 에너지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빅뱅으로 발생한 반물질은 정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노력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인류의 문명과 문화를 주도해왔습니다. 오늘도 저와 같은 '빅뱅가속기 사냥꾼'들은 LHC에서 답변을 찾기 위해서 탐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양자 우주에 대한 우리의 탐색이 이 거대한 질문들에 답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여러분도 언젠가 이 위대한 탐험에 함께 동참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경이로운 우주의 비밀을 함께 풀어갈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