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말
요즘 세상은 참 빠르게 변합니다. 기술 발전의 속도가 말할 수 없이 빠르고 새로운 기술이 만들어 내는 삶의 환경,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의 방식도 하루가 다르게 변합니다. 변화하는 다양한 것들 중에서도 제가 이 글을 통해서 같이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소리에 관한 것입니다. 소리의 변화, 소리로의 변화, 소리를 듣는 방식의 변화, 소리와 인간과의 관계의 변화, 그리고 그 결과로 생겨나는 소리 의미의 변화 같은 것 말입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최근에는 소리를 '듣는' 일이 글이나 화면을 '보는' 일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저는 요즘 아침에 일어나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과처럼 "헤이 구글, 오늘 날씨 어때?"라는 말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러면 아래 '그림1'처럼 생긴 '구글 홈 미니'가 오늘 날씨가 맑은지 흐린지, 최저, 최고 온도가 어떤지 알려줍니다. 전에는 스마트 폰이나 컴퓨터 창을 열어서 '오늘의 날씨'를 찾아 '읽었을' 정보들을 '듣고' 있는 거죠.
뿐만 아닙니다. 보는 일을 대신하는 듣는 일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널리 유행하던 팟캐스트는 주로 오디오 정보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글자가 아니라 소리로만 소통하는, '클럽하우스'라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인기를 끌기도 했었죠.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도 유행하고 있죠? 잠시 반짝 화제가 되었다가 사라질 줄 알았는데, 정말 다양한 소리, 다양한 방식의 ASMR이 생겨나서 ASMR의 장르들을 진지하게 연구해 보아야겠다는 생각마저 들더라고요. 전자책에서는 이제 당연하다는 듯 TTS(Text to Speech)서비스를 통해서, 전자책을 들을 수도 있게 해주고 있고, 오디오북의 인기도 꾸준합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전기밥솥에서, 에어컨에서, 정수기에서, 세탁기에서도 소리, 아니 요즘에는 그냥 소리가 아니라 말소리가 흘러나오더라고요.
자, 이렇게 찬찬히 생각해보니 정말로 뭔가 소리와 관련된 급격한 변화가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죠? 문자와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에 오랫동안 읽기와 쓰기에 집중되었던 관심이 서서히 듣기와 소리내기로 바뀌고 있습니다. 근대를 거치면서 세상을 열심히 '읽어' 내려고 했던 학자들은 이제 세상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정치경제학자인 아탈리(Jacques Attali, 1943~)는 「소음 (Bruits, 1977)」이라는 책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난 25세기 동안 서구의 학문은 세상을 바라보려고 했다. 세상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세상은 들어야 하는 것이다. 읽히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노력, 세상을 읽기 보다는 들으려는 노력, 사람과 세상을 들어서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이 최근에 유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이러한 관심을 가진 학자들, 모임, 책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우리는 '소리연구(Sound Studies)'라고 부릅니다.
소리연구
소리에 대한 연구가 2000년대에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닙니다. 생각보다 소리에 대한 연구는 오래 됐습니다. 아마 들어보셨을 겁니다. 피타고라스가 대장간 옆을 지나가다가 소리의 성질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요. 피타고라스는 특히 균질한 음높이와 자연배음을 가진 소리들, 즉 보통 우리가 음악적 소리라고 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모노코드(monochord)라는 악기를 만들어서 음의 성질에 관한 실험도 했고요.
이 악기를 통해서 현의 길이가 두 배가 되면 음이 한 옥타브가 낮아진다는 것, 완전5도 음정(예를 들면 도와 솔 사이의 거리)은 현의 길이로 말하자면 2:3의 비율을 갖는 것 등을 알게 되었지요. 완전 5도씩 음정을 쌓아올리면 결국 7옥타브 위의 같은 음에 도달한다는 것도 알게되었고(도-솔-레-라-미-시-파#-도#-솔#-레#-라#-미#-시#=도),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완전 5도를 12번 쌓아서 만나게 된 도(3/2의 12제곱)가 옥타브를 7번 쌓은 도(2/1의 7제곱)와 음높이가 미세하게 다르다는 것(그 차이를 '피타고라스 콤마'라고 부릅니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그리스 시대에도 제법 중요한 소리 연구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거죠. 어디 그 뿐일까요? 그 후로도 소리가 매질을 통해서 전해지는 다양한 방법들에 대한 연구들, 장애물을 만났을 때 공기의 진동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연구, 심지어 이런 연구들에 기초해서 하나의 커다란 실내 공간 안에서 어떻게 균등하게 모든 장소에 비슷한 음량과 음색의 소리가 전달될 수 있는지에 관한 연구, 각각의 음색(목소리를 포함하여)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각기 다른 음색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는지에 관한 연구, 또 이런 연구에 기초해서 특정한 음색 혹은 새로운 음색을 합성해 내는 연구, 혹은 MP3 파일에서 볼 수 있듯, 인간 귀의 듣는 능력과 경제적 효율성의 접점을 찾아내 소리를 저장하는 방식에 관한 연구들 등 소리에 관한 연구는 아주 옛날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오늘 소개하겠다고 하는, 그리고 2000년대부터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 소리연구는 대체 무엇일까요? 저 옛날 피타고라스 시절부터 연구하던 소리에 관한 연구와는 어떻게 다를까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리연구(sound studies)'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연구가 전통적 소리 연구와 다른 점은 이 연구들이 소리의 물리적 성질 만이 아니라 소리가 울리는 컨텍스트, 그리고 그 컨텍스트 안에서 소리가 가진 의미의 문제를 같이 다룬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이전의 소리 연구들은 소리를 하나의 고정된, 가치중립적 대상으로 여기고, 소리라는 현상 배후에 놓여있는 자연 법칙을 찾는 것,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법칙을 응용하여 삶의 다양한 현장에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200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새로운 소리 연구는 소리가 고정되어 있거나 가치중립적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소리는 그것이 울리는 컨텍스트 안에서 의미를 구성한다는 것이죠. 소리는,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리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가치중립적이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조금 이야기가 복잡해졌죠? 예를 들어 생각해 보죠.
소음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볼게요. 소음이 뭘까요? 네, 물론 시끄러운 소리입니다. 그러면 어떤 소리가 시끄러운 소리인가요? 아니면 누구한테 시끄러운 소리인가요? "소음은 이러저러한 것이다"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 사람은 소음(혹은 소음의 의미)가 대상의 고정적 속성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오랫동안 이런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소음을 대상의 속성이라고 생각하고 그 속성의 특징을 서술하는 방식 말입니다. 대체로 소음에 대한 두 가지 정의가 큰 힘을 발휘해 왔습니다. 첫 번째 정의는 '너무 큰 소리' 라는 정의입니다. 시시하다고요? 네, 뭔가 힘 빠지는 정의이기는 하죠. 하지만 이 정의가 실생활에서는 가장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정의이기도 합니다. 법에서 규정하는 소음이 바로 이 정의에 기초하고 있거든요. 재택근무나 온라인 수업이 일반화된 요즘에는 점점 더 층간 소음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고 있는데요, 바로 이런 층간 소음 문제 역시 법에서는 '너무 큰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정하고 있거든요. 예를 들면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에서 발생하는 층간소음의 범위와 기준에 대한 규칙(환경부령 제599호, 국토교통부령 제97호, 2014년 6월 3일 개정)이 있습니다. 제3조에서는 직접 충격음의 경우 1분간 등가소음도가 주간 43데시벨, 야간 38데시벨, 그리고 최고 소음도는 주간 57데시벨, 야간 52데시벨을 넘으면 그것을 '너무 큰 소리' 즉 소음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니까 법률에서 정하는 소음의 정의는 일정 기준을 넘어서는 '큰 소리'인거죠. 하지만 이 정의에 기초한 법령이 알려주는 것처럼 큰 소리는 그 환경과 맥락에 따라 달라집니다. 밤이냐 낮이냐에 따라 달라지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도서관에서의 큰 소리와 노래방에서의 큰 소리가 같을 리 없잖아요. '너무 큰 소리'라는 소음의 정의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지만 여전히 상대적이고 그 소리가 울리는 환경에 따라, 그리고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듯, 듣는 사람과 그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소음에 대한 또 다른 막강한 정의는 디지털 신호처리(Digital Signal Processing, DPS) 공학자들의 정의입니다. 이 분들은 신호처리 회로의 중요한 항들을 발화자, 신호, 채널, 소음, 수신자라는 개념으로 정리하고 이 중 소음을 커뮤니케이션 회로에서 주 신호를 방해하는 것, 원치 않게 끼어 든 소리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신호처리에서 중요한 목표는 주 신호를 방해하는 다른 신호, 즉 소음을 없애거나 최소화 하는 것입니다. 전하려는 중요한 신호 외의 소리를 소음으로 정의하는 것은 매우 효율적이고 객관적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 분들의 정의를 일상에 적용하는 것이, 늘 그리 매끄러운 것만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저는 기타 연주를 들을 때 기타 현이 울려 만들어지는 선율이나 화음을 듣는 것도 좋지만 가끔 그 속에 섞여 들리는 잡음, 특히 왼손이 기타 지판과 현 위를 미끄러져 움직이면서 나는 소리를 참 좋아합니다. 명백히 주 신호를 방해하는 다른 신호겠죠. 주 신호는 선율, 화성과 같은 의도적으로 구성된, 정리된 소리 일 테니까요. 그러나 의도하지 않았고 심지어 음높이도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 그 소리가 제게는 정말로 음악적으로 들립니다. 기타 연주를 하는 사람의 모습이 그 소리 속에서 떠오르기도 하고, 음악적 소리 속에 섞인 비음악적 소리가 묘한 긴장과 쾌감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요컨대 주 신호와 그것을 방해하는 신호를 구분하는 일도 실생활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음악적 소리(일정한 음높이가 있고, 자연배음을 가졌다는 물리적 성격을 가진 소리)가 아니라고 꼭 소음이 되는 것만도 아니고요. 그 관계가 같은 장소에서도 시시각각 변하기도 하구요.
좀 장황했나요?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소리나 소리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소음이 만일 특정한 물리적 속성으로 정의될 수 있다면, 즉 듣기 싫은 어떤 성질이 소리 자체에 내재하고 있다면 그것에 대한 물리적 연구만 해도 될 겁니다. 하지만 소리의 의미('소음'이라는 말도 어떤 소리에 부정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겠죠?)는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울리는 공간적, 시간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 안에서 만들어져 갑니다. 소리의 의미는 규정(define)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construct)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바로 이런 생각이 2000년대에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소리연구의 출발점입니다. 지금까지 소리를 물리적으로, 소리의 의미를 고정적으로 연구했다면, 이제는 소리와 소리의 의미를 그것이 처한 맥락 안에서 우리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소리연구는 음향학, 음성학 등과 같이 자연과학에 경도되어 있던 소리에 관한 연구에 인문, 사회학적 통찰, 즉 음악학, 철학, 문화학, 인류학, 지리학, 젠더 연구, 역사학, 사회학, 생태학 등의 접근방식을 더 하자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다양한 학문 분야가 자연스럽게 융합되고 여러 가지 방법론들이 사용되다 보니 이 학문 분야를 하나로 꼭 집어 표현하기 힘들게 되었고 그 결과 영어권에서는 이 학문의 이름을 복수형으로 붙여 sound study가 아니라 sound studies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소리풍경 (soundscape)
이른 시기에 소리를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닌 우리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 살펴보고자 했던 중요한 사람은 셰퍼(R. Murray Schafer, 1933-2021)(그림3)였습니다. 이 분은 작곡가면서 동시에 음악교육자이기도 했고, 저술가이자 환경론자이기도 했습니다. 이 분은 자신의 책 Soundscape: the Tuning of the World(「사운드스케이프: 세계의 조율」)을 통해 소리풍경(soundscape)라는 말을 널리 알렸습니다. 영어를 보면 짐작할 수 있듯 이 단어는 소리(sound)와 풍경(landscape)이라는 말을 합쳐서 만든 신조어입니다. 셰퍼가 처음 만든 말은 아니었지만 이 분이 이 말을 널리 알리고 이 개념의 중요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이 분의 의견을 따르자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풍경(landscape) 안에서 살아가듯 소리로 들리는 풍경(soundscape) 안에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지만 그 동안 눈에 보이는 풍경에는 관심을 기울여왔지만 들리는 풍경에는 덜 관심 가져왔다는 것이 이 분의 생각입니다. 만일 환경으로 이야기를 바꾸어 보자면, 보이는 풍경의 환경, 대기의 환경에는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들리는 환경, 청각 환경, 소리환경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셰퍼는 들리는 환경도 우리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강조하고 마치 시각적 환경과 대기 환경이 오염되었듯 청각적 환경 역시 심각하게 오염되었다고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분은 지구상의 각 지역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소리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바닷가는 바닷가 나름의, 산골마을은 산골마을의 소리정체성을 가지고 있겠죠. 세계의 각 도시들도 각각의 도시가 나름대로의 독특한 풍광과 분위기, 냄새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모두 각기 다른 소리를 가지고 있었겠죠. 그리고 또 그 지역을 대표하는 소리, 사운드마크(soundmark, 물론 랜드마크에서 착안한 말입니다)가 있었겠죠. 그런데 기술이 발달하고 그 기술이 온 세계에 퍼지면서 모든 도시가 동일한 소리환경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탄합니다. 서울, 런던, 뉴욕, 파리, 동경, 이 모든 도시들이 기본적으로 내연기관(즉 자동차, 오토바이) 소리와 에어컨 소리, 소리의 소재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나오는 음악과 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각 지역과 공간의 독특한 소리환경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죠. 셰퍼는 이 상태가 소리환경의 오염 상태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이 분의 저서 제목이 흥미로운데요, 이렇게 오염된 소리풍경, 소리환경을 바로잡는 일을 셰퍼는 세계의 '조율'이라고 생각하여 이 말을 저서의 부제목으로 사용했던 것이죠.
어떤가요? 소리의 물리적 성질을 탐구하던 이전의 소리 연구와는 좀 결이 다르죠? 만일 우리가 셰퍼가 제안했던 '소리풍경'이라는 개념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서술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주제들이 더 많이 생깁니다. 그 중에서도 간단하게 한 가지만 이야기해 볼까요?
1979년에 일본 소니사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소리 재생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림4)
이 기계는 당시에 유행하던 소리 저장 장치인 카세트 테잎을 재생하는 장치였는데요,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크기를 작게 만들어 이 재생장치를 들고 다닐 수 있게 만든 것이었지요. 바로 이 기계가 '워크맨'이라는 기계였습니다. 물론 머리에 헤드폰을 쓰고 음악을 듣는 것이었구요. 음악 재생 기계를 들고 다닌다는 개념을 이 기계가 처음 만든 것이니, 그 후에 등장한 아이폿이나 아이리버, 그리고 오늘날 스마트폰과 이어폰/헤드폰으로 음악을 듣는 관습은 워크맨을 따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자, 이렇게 음원 재생 기구를 들고 다닐 수 있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될까요? 그렇습니다. 이 기계를 통해서 우리는 소리풍경을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된 거죠. 눈에 보이는 풍경은 가지고 다닐 수 없습니다만, 이제 소리풍경은 가지고 다닐 수 있게, 즉 모빌리티(mobility)를 가지게 된 거죠. 심지어 요즘에는 필요하면 주변의 소리를 '지울'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노이즈 캔슬링(noise cancelling)이라는 기술로 말이죠. 재밌죠? 이렇게 새로운 소리연구는 소리의 물리적, 객관적 성질보다는 소리와 우리의 관계에 더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리풍경의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게 됐죠? 사실은 이런 일, 즉 공간이 가지고 있은 원래의 소리정체성과는 다른, 타 공간의 소리가 한 자리에서 섞이는 일 혹은 소리풍경이 이동하는 일은 자동차의 카스테레오의 발전, 혹은 더 멀리는 라디오, 전화기의 발명에서 시작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즉 기술의 발전과 변화가 소리풍경의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오늘 날 소리풍경 이야기, 그리고 소리와 청취에 관한 이야기는 그 것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고 있는 기술(technology)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고 할 수 없을 것 같네요.
기술(technology)과 청취의 기술(technics of listening)
기술은 소리를 바꿉니다. 소리풍경도 바꾸죠. 인간과 소리가 만나는 양상을 바꾸어 놓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이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리가 그 소리를 원래 만들어 내는 그 원래의 것이 보이지 않는, 그런 소리를 듣습니다. 카페에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온다고 해보죠. 녹음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면 아마도 그 카페 어딘가에 재즈 연주자들이 악기를 들고 직접 연주를 하고 있었겠죠. 하지만 요즘에는 카페에서 재즈 음악이 나온다고 해서 그 카페에 재즈 연주자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음악을 만들어내는 그 원천이 눈앞에 없는데도 들리는 소리, 이것을 보통 어쿠즈마틱(acousmatic) 사운드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소리를 듣는 대부분의 경험이죠. 기술이 바꾸어 놓은 소리와 인간과의 관계, 소리를 듣는 양상입니다.
기술은 음악과 소리를 듣는 방식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일상생활과 밀접한 수많은 소리들과 음악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소리라고, 혹은 음악이라고 인지조차 하지도 않는 그런 것들 말이죠. 일상의 음악(everyday music)이라고 할까요? 지하철 환승역을 지시하는 음악, 신호등이 켜졌음을 알리는 소리, 엘리베이터, 카페, 쇼핑몰에서 나오는 음악들이요. 우리는 이러한 음악들을 열심히, 집중해서 듣지 않습니다. 그저 배경음악으로, 마치 방 안에 있는 벽지처럼, 그렇게 듣습니다. 기술이 바꾸어 놓은 우리의 청취 관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이동하는 소리풍경 기계들, 그러니까 이어폰이나 헤드폰으로 음악이나 소리를 듣게 하는 기계들은 소리와 음악을 듣는 우리의 관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처음 이 기계가 나왔을 무렵, 그러니까 워크맨 시절에는 늘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끔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제 생각에는 아이폿이 대중화된 이후라고 생각되는데요, 집 밖에 나갈 때면, 마치 옷 입듯 늘 이어폰을 챙겨나가는 세대가 등장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 세대에 속할지도 모르겠네요. 이들이 소리나 음악을 듣는 방식은 그 전 세대, 예컨대 제가 소리나 음악을 듣는 방식과는 다릅니다.
얼마 전, 저는 '쩌는 음색'이라는 표현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말이 지칭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그 표현을 누가, 어떨 때 사용하는지에 관한 연구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여기서 다 하기는 어렵지만 제 결론의 일부는 똑같은 음악이나 소리라도 세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듣는다는 것입니다. 흥미롭지 않나요? 여러분과 여러분의 부모님이 동시에 같은 노래(저는 '잔나비'의 노래를 가지고 연구를 시작했었습니다)를 듣는다 해도 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른 것을 듣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리고 그 차이는 이어폰을 옷 입듯 입고 나가는 사람들과 특별한 일 없이는 이어폰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 즉 특정한 기술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느냐로 구분되는 청취의 세대 차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기술(technology)은 듣는 방식, 즉 각기 다른 청취의 기술(technics of listening)을 만들어 낸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러므로 소리연구는 기술의 발전, 변화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집니다. 그것이 소리와 청취에 중요한 변수가 되기 때문이죠.
소리적 상상력(sonic imagination)
결국 소리연구는 소리로, 소리를 통해서, 소리적으로 인간과 사회, 문화를 '듣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리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인간과 그 사회, 문화를 이해하는 거죠. 그렇게 귀를 열어 사회와 문화를 들으면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기기도 하고 그 소리를 통해서 사회, 문화의 관습과 생각, 편견들이 들리기도 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세대 차가 들리기도 합니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의 초기설정 목소리가 하필이면 '표준말'을 쓰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라는 것, 뿐만 아니라 비슷한 일이 빅스비, 시리, 그리고 전기밥솥, 세탁기, 정수기에도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채기 시작한다면, 이 소리들이 어쩌면 우리 사회의 젠더적 편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클래식이니 재즈니 팝송이니 트로트니 하는 음악의 장르들이 그저 음악적 특징에 따른 분류법인줄만 알았더니 그 각각을 좋아하는 성향, 즉 음악적 취향이 문화자본, 교육자본 등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의 주장을 접하고 나면 소리와 소리에 대한 취향이 계층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야구장에서 선수들 한 명, 한 명에게 각각의 응원가가 있어 그들에게 소리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울 수도 있고, 소리와 음악에도 중심으로 여겨지는 것과 주변으로 여겨지는 것이 있어 음악/소리적 사투리라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 여기저기 숨겨져 있는 재미있는 소리 아이디어를 발견하고 웃음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자나 화살표 대신 똑 똑 물 떨어지는 소리를 따라가면 등장하는 사우나가 있는 호텔, 차를 타고 언덕길을 급하게 내려오다 보면 길에 파인 홈을 바퀴가 지나가며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하는 노래가 나오는 강원도 어느 산에 있는 도로, 이런 것들 말이죠. 그런 즐거운 상상을 더 마음껏 펼쳐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조명이 멋진 공원 대신 소리가 멋진 소리 공원, 소리가 정보를 전하고 소리가 환경을 쾌적하게 만드는 소리 중심의 스마트 도시 같은 것들 말입니다.
소리를 그저 저 멀리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나와의 관계 안에서 생각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문화라는 컨텍스트 안에서 사용하며, 그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것, 소리적 상상력으로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 가꾸어 나가는 일, 그것이 바로 소리연구가 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