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음악의 탄생
동서양 문화권 모두에서 음악과 악기의 신성한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악기는 신이 발명했고, 최초의 연주자도 아폴론, 헤르메스, 아테나, 뮤즈, 팬 같은 신이었다. 제우스(빛과 창공의 신이자 벼락의 신)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노래나 시로 남기고 싶어 했지만, 그것을 담당한 신이 없었다. 기가시(인간의 얼굴과 용의 몸을 가진 거인족)들과의 전쟁에서 이긴 제우스는 승전가를 만들 신을 창조하기 위해 이 전쟁에 대해서 상세히 기억하고 있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기우라노스와 가이아의 딸)와 아홉 밤을 연이어 동침하여 일 년 후에 아홉 명의 딸을 낳았다. 이렇게 탄생한 아홉 자매를 그리스어로는 무사이(mousai), 영어로는 뮤즈(muse)라고 부른다. 이들은 각기 예술, 문학, 과학의 특정 영역까지 관장하는 여신들로, 첫째 클레이오는 역사, 둘째 우라니아는 천문학, 셋째 멜포메네는 비극, 넷째 탈리아는 희극, 다섯째 테릅시코레는 합창단의 춤과 노래, 여섯째 폴리힘니아는 종교찬가, 무용과 판토마임, 일곱째 에라토는 연애시, 여덟째 에우테르페는 서정시, 막내이자 뮤즈들의 리더인 칼리오페는 서사시와 현악기를 주재했다. 뮤즈들은 예술적 영감을 주재하는 대표적인 신이며, 이들의 상징물로 동반되는 악기들은 예술적인 영감을 나타낸다. 오늘날의 뮤직(music, 음악)이라는 말은 뮤즈들이 관장하는 행위, 예술, 또는 기술을 의미하는 무지케(musike)에서 유래된 것이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뜻하는 뮤지엄(museum)은 뮤즈들이 사는 신전인 무사이온(mousaion, 라틴어로 musaeum)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II. 악기의 탄생(리라와 아울로스)
그리스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악기인 리라(Lyre)와 아울로스(Aulos)의 탄생에도 각기 전해지는 신화가 있다. 지략의 신이자 전령의 신인 헤르메스(아틀라스의 딸 마이아와 제우스의 아들)가 아폴론(제우스와 레토의 아들)에게서 훔친 황소의 힘줄 아홉 개를 거북이의 등껍질 각 끝에 걸어 만든 악기가 리라였다. 도둑맞은 황소 때문에 화가 난 아폴론에게 헤르메스는 화해를 청하며 이 리라를 바쳤고, 이후 아폴론이 항상 지니고 다니는 악기가 되었다.
관악기인 아울로스는 지혜의 여신이자 전술의 신인 아테나(제우스와 메티스의 딸)가 만들었다고 한다. 페르세우스가 아테나 여신에게서 빌린 방패, 헤르메스로부터 빌린 날개 달린 구두와 모습을 감추어 주는 모자의 도움으로 메두사의 머리를 베었을 때, 메두사의 자매인 에우리알레는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며 통곡했다. 그 모습을 본 아테나가 그녀의 처절한 감정을 재현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울로스이다.
III. 이성과 지혜의 상징, 리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악기들은 이성과 지혜, 감성, 본능, 욕망, 유혹 등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가치들을 상징한다. 이성과 지혜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악기는 주로 현악기이며, 그 대표적인 예로 리라를 들 수 있다. 리라는 현을 뜯어서 연주하는 발현악기이며, 아폴론을 상징하는 악기이다. 태양의 신, 의술과 궁술의 신이자 뮤즈의 후견신이기도 한 아폴론은 합리적인 이성을 소유한 신으로, 논리, 이성, 진리, 지성 절제 등을 상징하며, 그가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연주하는 악기는 절제, 고요함, 평온을 가져오는 리라이다. 리라가 아폴론의 속성인 이성적 사고를 상징하고 있는 이유는 리라의 청명한 음색과 여러 현들의 조화로운 울림에 기인한다.
리라는 신화 속에서 지혜를 전하는 현자들이 동반하는 악기로도 등장한다. 많은 영웅들을 교육시켰던 케이론(오케아노의 딸 필리라와 크로노스의 아들)은 제우스 및 올림포스 신들과 같은 세대에 속하는 신으로, 상체는 사람의 모습이지만 하체는 말의 형상을 한 켄타우로스의 일족이다. 그리스 신화의 대표적 현자이자 훌륭한 리라 연주자였던 그는 아폴론을 비롯해, 이아손, 아킬레우스, 악타이온, 아스클레피오스 등 많은 영웅들에게 전쟁술, 사냥술, 윤리, 의학, 리라 등을 가르쳤다. 케이론이 영웅을 교육하는 장면을 그린 미술작품들에는 리라 연주법을 가르치는 모습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다. 케이론의 리라 교육은 지혜를 전수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 경우에도 리라는 이성과 지혜를 상징한다.
리라가 이성과 지혜의 상징으로서 나타나는 또 다른 예로 오르페우스 신화를 들 수 있다. 오르페우스(트라키아의 왕 오이아그로스와 칼리오페의 아들로 추정됨)는 그리스 신화를 통틀어 최고의 시인이자 음악가였고, 특히 리라 연주자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오르페우스의 리라 연주가 의미하는 이성과 지혜의 위대한 힘은 아르고 원정담에서 나타난다. 아르고 원정담은 이아손이 왕위를 되찾기 위해 헤라클레스, 오르페우스, 테세우스, 카스토르, 폴리데우케스, 린케우스, 이다스 등과 함께 황금양모를 구하러 모험을 떠난 이야기이다. 다른 용사들과 달리 음악가였던 오르페우스는 배의 속도나 방향을 조정해주는 정조수 역할을 맡았는데 항해 중에 거친 풍랑이 일 때는 노래와 연주로 선원들을 진정시키고 거센 파도를 잠재우기도 했다.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귀환하던 원정대의 배가 사이렌의 바다를 지나게 되었다. 상체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고 하체는 새의 모습을 한 사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로 인근을 지나가는 선원들을 유혹해 목숨을 앗아가는 마녀들이었다. 사이렌의 노래에 현혹된 선원들이 이성을 잃고 배가 난파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오르페우스는 사이렌의 노래 소리보다 더 크고 아름답게 노래와 리라를 연주하여 선원들의 이성을 회복시킴으로써 배는 무사히 사이렌의 바다를 벗어나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다. 사이렌의 유혹을 물리친 오르페우스의 리라는 절박한 위기도 극복해 낼 수 있는 이성과 지혜의 가치를 은유한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디디케의 이야기는 미술, 문학, 음악 등 장르를 불문하고 많은 작품들에 소재를 제공해준 신화이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 에우리디케를 잃고 절망에 빠진 오르페우스는 아내를 되찾아오기 위해서 하계로 내려간다. 리라 연주로 스틱스 강을 지키는 카론, 케르베로스를 비롯해 자신을 가로막던 여러 혼령의 무리들을 헤치고 하계의 신인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앞에 선 오르페우스는 역시 리라 연주로 그들을 감동시켜 아내를 되돌려 받게 된다. 이 이야기에서도 리라는 위기를 극복하고 방해자들을 설득하는 위대한 지혜로 형상화 되었다.
암피온(제우스와 테베의 여왕인 안티오페의 아들)의 이야기에서도 리라는 이성과 지혜를 은유한다. 헤르메스로부터 리라 연주법을 배운 시인이자 음악가였던 암피온은 테베의 왕권을 찾은 후, 테베 성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서 쌍둥이 형제 제투스와 함께 테베의 성벽을 쌓게 되는데, 몸을 쓰는 격렬한 기술에 능했던 제투스가 큰 돌을 옮기는 데 어려움을 겪자, 암피온은 리라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아름다운 선율에 무거운 돌들이 스스로 성벽 쪽으로 움직였다고 한다. 즉, 힘보다는 지혜를 이용해서 거대한 성벽을 쌓은 것이다.
음악가 아리온의 리라 또한 이성과 지혜를 의미한다. 시실리 섬에서 개최된 음악 경연대회에 참가해서 우승과 더불어 많은 상금을 탄 후 고향인 코린토스로 돌아가는 아리온의 꿈에 아폴론이 나타난다. 아폴론은 선원들이 아리온의 상금을 빼앗기 위해 그를 죽이려고 하니 조심하라고 일러주며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날 적들의 손에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아리온은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리라 연주를 한 번만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리라 소리가 바다로 퍼지자 아폴론의 동물인 돌고래들이 몰려왔다. 아리온은 아폴론의 약속을 믿고 바다로 뛰어들었고, 돌고래 한 마리가 그를 등에 태우고 육지까지 데려다 주었다. 아리온은 육지에 당도하자마자 아폴론에게 감사의 봉헌물을 바쳤고, 아폴론은 아리온의 모험을 기념하기 위해 그를 구해준 돌고래를 하늘에 별자리로 만들었다
IV. 감성과 본능의 악기, 아울로스와 시링크스(팬파이프)
그리스 신화에서 관악기는 일반적으로 감성과 본능을 상징하는 악기로 등장한다. 특히 아울로스는 리라와 대비되는 악기로서 자연의 신, 포도주의 신, 신비적 광기의 신인 디오니소스와 연관된다. 아폴론이 리라를 직접 연주하는 것과 달리 디오니소스는 아울로스를 직접 연주하지 않았다. 아울로스는 디오니소스를 추종하여 따라다니는 반인반수 사티로스들과 광신도 여인들인 마이나데스 같은 디오니소스 추종자들이 연주하는 악기로 알려져 있다. 자매를 잃은 슬픔으로 통곡하던 에우리알레의 처절한 감정을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아울로스의 음색이 광기어린 축제의 황홀하고 격정적인 분위기를 고양하는데 잘 어울렸기에 디오니소스의 제전에 사용하는 악기로 지정되었다. 아울로스는 격정적인 감성과 본능을 상징한다.
신화에 등장하는 또 다른 관악기로, 자연과 야생, 목축의 신인 판이 만든 시링크스(Syrinx)가 있다. 헤르메스의 아들로 추정되는 판은 반인반수로 하반신은 염소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길이가 다른 여러 개의 관을 엮어 만든 시링크스는 원래 판이 짝사랑했던 님프의 이름이며, 판이 만들었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팬파이프 또는 팬플류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님프인 시링크스는 자신을 보고 쫓아오는 판을 피해 도망갔으나, 강이 앞을 가로 막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자 대지의 여신에게 자신을 갈대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갈대로 변한 시링크스의 모습에 낙심한 판은 슬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갈대를 꺾어서 악기로 만들었다. 판은 공포, 쾌감, 욕정 등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들이 의인화된 존재이다. 따라서 판의 상징물인 시링크스는 관능적이면서 심금을 울리는 음색을 가지고 있으며, 감성과 욕망을 나타낸다. 판은 어둡고 깊은 숲을 근거지로 하고 있어서 극심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극심한 공포 또는 공황을 의미하는 '패닉'(panic))이라는 말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V. 맺음말
신화의 악기들은 이성과 감성 같은 인간성, 그리고 지혜, 유혹, 욕정 등 인간 행위의 다양한 가치들을 형상화 해주는 물질적 실체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리라 같은 현악기와 아울로스나 시링크스 같은 관악기는 일반적으로 각각 이성과 감정을 상징하며, 때로는 양면적이거나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신화에서 형성된 악기들의 이미지와 상징은 이후의 음악문화 전반에 투영되어 왔다. 그리스 신화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서 다양한 예술 장르에 많은 소재들을 제공하였고, 특히 서양음악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며 전승되었다. 이성의 가치를 대변하는 아폴론과 감성의 가치를 대표하는 디오니소스는 서양의 이원론적 음악역사의 기원이 되는 신들로서, 시대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 고전주의와 감정의 흐름을 중심으로 한 낭만주의로 그 정신이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