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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과학 활동을 위한 융합연구 프로그램(CRP)
윤건수 포스텍 입학학생처장
들어가는 글
지난 2월 10일, 포스텍에서는 팬데믹의 긴 터널을 뚫고 오랜만에 사람들로 가득 찬 졸업식 행사를 가졌다. 비대면 행사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졸업생들의 설렘, 학부모들의 자랑스러움, 교수들의 뿌듯함이 표정과 몸짓과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진짜" 행사에 비할 수 없었다. 호흡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기뻐하는 자리가 정말 소중한 것이란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음악을 듣는 것에 대해 나는 오랫동안 유사한 부류의 차이를 느끼고 있었다. 스피커를 통해 재생되는 소리를 듣는 것이 편리하긴 하지만 살아있는 소리를 듣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을, 대학생 시절 풍물패 동아리 활동을 하는 물리학과 친구의 연습실에 우연히 들렸다가 북소리 가득한 공간에서 힘찬 북소리와 함께 가슴이 울렸던 경험은 그런 차이를 처음으로 실감케 한 사건이었다. 박사학위 유학 시절, 캘리포니아 파사데나의 작은 교회의 새벽 시간을 잠잠히 채우던 남성 중창단 아저씨들의 노래도 각인된 경험으로 남아있다. 이민자로서의 삶을 묵묵하게 살아가시는 분들의 화음과 몸짓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이 있었고 공부와 연구로 지친 나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지난 가을에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장 중에 보티프(Votiv)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가 운이 좋게도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듣게 되었는데 시공간을 채우는 소리와 하나가 되는 황홀한 경험을 하였다 (그림1).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오르간 연주자는 학부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전공하였다고 한다)
물론, 한국에 돌아와 똑같은 곡을 유튜브에서 찾아서 들었을 때는 그런 느낌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현장 음악 또는 공연 음악의 이런 풍부함은 아마도 오랫동안 디지털 음악으로는 재생이 되지 않을 특성일 것 같다. 지난 1월 초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2023년 Consumer Electronics Show (CES)에서 유명한 전자악기 전문회사인 Roland 사에서는 피아노 공연을 모사하기 위한 전자피아노 시스템 개념을 선보였다 (그림 2). 드론으로 떠 있는 스피커를 통해 공연장의 공간적인 특성을 모사하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앞으로 발전하겠지만 아직 실제 공연을 따라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음악을 듣거나 감상하는 경험에는 청자의 음악에 대한 지식도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음악에 대해서 무지했고, 악기라고는 그 흔한 리코더도 제대로 불지 못했었는데, 1991년 무렵 서울과학고등학교 음악 수업을 맡으셨던 정영일 선생님께서 서양 고전음악의 논리적 체계를 알게 해주셨다. 어느 날 처음 보는 교향곡 악보 (score) 사본을 받아서 들게 하고 재생되는 음악에 맞춰 악보를 따라가게 하셨는데, 나는 너무 당황하여 머릿속이 하얘졌었다. 그런 방식의 수업이 진행되는 기간 내내 그림3과 같은 악보를 보고 악기별로 소리를 구분하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저는 음악 전공 학생이 아니잖아요!'라는 항의를 마음속에 삭이며,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상하거나 신기하게 보일 수도 있는 수업 방식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내신 특혜제도 등으로 인하여 대학입시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운영되었던 과학고등학교 환경 덕분에 그런 전문적인 음악 교육이 가능했었으리라. (사실 음악 교육뿐만 아니라 모든 과목에서 선생님들은 대학입시에 구애받지 않고 학생 수준에 맞는 최고의 수업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하셨다) 그런 특별한 교육 덕분에 고전음악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고 지금껏 많은 음악을 풍성하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직업으로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음악 감상이 물리 현상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주는 미묘한 경험을 하곤 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경험한 적이 있다) 상당한 수준의 바이올린과 피아노 연주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아인슈타인이 '나는 음악을 통해 생각하고 음악 속에서 공상에 빠진다' 라고 말한 것과 같은 수준은 아니지만, 그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공감하고 있다 (그림 4). 아인슈타인에게 음악은 아마도 통상의 언어나 수학적인 논리를 바탕으로 사고하는 일반적인 방식과는 다르게 감각적인 직관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즉, 아인슈타인은 그가 경험을 통해 내재화한 음악의 체계와 논리를 직관적으로 참조하며 그의 과학 이론을 구축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추측을 해본다.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피아노 연주에 빠져있었다고 하는데, 이 사례는 예술에 존재하는 사고방식을 통해 과학기술의 혁신을 끌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음악이 서양의 전통 인문학 교육, 즉 자유 시민의 교양에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 가르쳤던 7개의 과목에 (문법, 수사학, 변증법,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 포함된 것은 융합형 인재상이 강조되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히려 지금의 과학고와 영재고에서는 과거보다 대학입시 및 내신 경쟁에 더욱 몰입된 환경으로 인하여 음악을 포함한 인문학의 많은 요소들이 약화된 것 같다. 또한, 학생들의 과학적 재능 계발을 위해 매우 중요한 R&E 프로그램이 대학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생들에게 외면받고 있다는 선생님들의 지적은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내신 경쟁에 도움이 되는 대부분의 공부가 소수의 정해진 유형의 문제에 대해 기계적으로 정답을 찾아내는 훈련 활동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학습 방식은 심층기계학습의 관점에서 과대적합(over-fitting) 학습 결과를 유발하는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이다. 즉, 특정 유형에만 문제 풀이 능력이 고착화되어 새로운 유형 또는 상황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연한 능력을 개발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다소 단순화된 예를 들면, 흰색 고양이만 보며 고양이의 특성을 학습한 사람이 검정색 고양이를 보고 그것을 고양이로 인식하지 못하는 황당한 결과가 과대적합의 사례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등학교 때 배운 지식, 심지어 대학교에서 배운 지식의 대부분이 사회 생활에서 쓸모없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그런 반응을 고양이 사례와 유사한 과대적합의 폐해로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정답이 있는 상황들에 대해 과대적합을 유발하는 교육 환경의 또다른 부작용은 새로운 문제를 발굴하는 능력 발달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실제 연구 현장에서는 정답이 없거나 정의하기 어려운 경우가 아주 흔하며, 지금 시대의 과학자에게 더욱 요구되는 자질은 중요한 문제를 스스로 발굴하고 해결 방법을 찾는 능력이다.
"기존의 사고방식과는 다른 종류의 사고방식을 경험,
정서적으로 풍성한 삶을 도와주는 과학 활동 체험"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과학영재 학생들에게 기존의 사고방식과는 다른 종류의 사고방식을 경험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융합형 연구 프로그램 (Convergence Research Program; CRP)을 기획하게 되었다. 실리적인 관점에서 CRP는 기존의 R&E 프로그램 체계에서 운영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목적 달성을 위해 정서적으로 풍성한 삶을 도와주는 과학 활동 체험을 제공하고 대학-고등학교 간의 협력 모델을 발굴하는 그것을 목표로써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개별 CRP 프로그램의 콘텐츠를 개발할 때 견지해야 할 3가지의 기획 요소를 정하였다.
1 연속성: 주제 및 참여교수의 유지를 통해 활동의 완성도를 지속적으로 높이고 일관성을 유지한다.
2 협력: 대학에서 개별 콘텐츠를 개발하고 운영에 필요한 자원 지원에 협조한다. 교사를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교수 및 외부 전문가가 함께 참여한다.
3 융합: 예술, 인문, 스포츠 등의 분야에서 흥미 있는 주제를 발굴하고 과학적인 방법론을 접목한다.
위와 같은 기획 요소를 바탕으로 지난해 상반기에 '양자물리와 음악'을 주제로 CRP 과제를 개발했다. 양자물리를 선태학 이유는 COVID19 팬데믹 기간 동안 양자컴퓨팅 관점에서 양자물리학을 소개하는 동영상 강의를 촬영하여 이미 많은 자료가 준비된 상태였고 또한 평소에 음악의 여러 요소가 양자물리 현상과 유사성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콘텐츠는 크게 강의, 강연, 실습으로 구분하였다. 강의는 주로 양자물리의 개념과 음악의 체계를 설명하는 자료들로 구성하였는데, 물리학적인 내용은 차근차근 스토리 텔링 방식으로 설명하였고 음의 조화를 수학의 측도 이론 (Measure theory) 관점으로 설명하는 자료도 제작하였다. 여기에 더해 양자물리 개념에 빗대어 사람의 음 인식 원리를 제시한 Dennis Gabor의 양자화된 음소 (acoustic quanta) 이론을 소개하였다. 홀로그램을 개발한 공로로 197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Gabor는 소리를 정보전달의 관점에서 연구하여 음향학 분야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음악 체계에 대한 이론은 영남대학교 음악대학의 백윤학 교수가 맡아 강의 자료를 개발하였다. 같은 고등학교에서 나와 함께 공부한 백윤학 교수는 지휘자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 대학까지의 전공과 우수한 수학 실력을 바탕으로 뛰어난 전기·전자 공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예술에서의 미학에 대한 관점을 소개하는 강의는 미술사 전문가인 포스텍의 우정아 교수께 부탁드렸다. 강연은 전문 연주자들을 초빙하여 간단한 공연과 함께 트럼펫, 첼로, 피아노 등의 악기를 소개하도록 구성하였다. 녹음된 음원보다 실제 악기기 '말하는' 소리를 직접 듣는 것은 음악에 대한 인식 경험의 질과 폭을 높이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실습을 위해서는 범용의 기호 연산 도구인 Mathematica를 사용하여 강의와 관련된 예제 코드 및 Gabor의 음소 이론을 테스트해보는 코드를 개발했다. Gabor의 이론에 기반하여 개발된 전자음향합성법인 Granular Synthesis를 소개하고 실제로 음향을 합성해보는 실습 자료는 음향전문가인 고병량 작가께 부탁하여 개발하였다. 실습의 주요 도구로 Mathematica를 선택한 이유는 직관적인 사고를 돕는 일에 적합한 매우 뛰어난 컴퓨팅 언어 체계 (Wolfram Language), 유연한 데이터 처리 기능, 그리고 다양한 시각화 기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5). '양자물리와 음악' CRP의 전체 내용은 현대물리학의 언어, 음악의 언어, 그리고 Mathematica에 담긴 컴퓨팅 언어가 융합되어 폭넓은 사고 방식을 경험할 수 있도록 고안됐다고 요약할 수 있다.
기획된 내용을 실제로 시행하는 것은 별도의 노력을 쏟아 부으며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는 어려운 과정이다. '양자물리와 음악' CRP는 광주과학고와의 협력을 통해 지난해 7월에 포스텍 캠퍼스에서 4박 5일의 캠프 형태로 변형하여 처음으로 시행해볼 수 있었다 (그림 6, 7). 개발에 참여한 모든 분의 헌신적인 노력과 광주과학고 학생들의 열띤 참여가 있었고, 이를 통해 융합적 사고방식에 기반한 연구 프로그램이 영재교육에 이바지할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강사, 연주자, 조교, 학생 등 다양한 사람이 참여한 캠프를 통해 음악이 가지고 있는 힘과 매력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음악 작품에 담긴 객관적 음의 나열을 뛰어넘어 작곡자의 이야기, 연주자의 음악에 대한 해석과 그것을 듣는 청자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종합예술인 음악이 가진 매력인 것 같다. 이와 같은 음악의 특성이 융합적 사고를 배양하고 과학 영재교육에서 지향해 온 과학적이며 수리적인 사고를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앞으로 CRP의 아이템은 미술, 국악, 축구 등 다양한 분야의 주제와 과학기술이 접목된 형태로 발굴될 것이며, 사고 방식의 지평을 넓히는 교육 방법으로서 발전할 것으로 기대한다. 대학 내외의 우수한 연구자들 만나면서 많은 분들이 과학 외의 분야와 융합하며 과학영재 교육에 기여할 수 있는 컨텐츠들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국악 밑도드리의 창작 원리를 수리데이터과학으로 풀어내고 한국종합예술종합학교 등과 함께 기계작곡음악 공연을 이루어낸 포스텍 수학과 정재훈 교수의 사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다수 분야의 전문가들과 교사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플랫폼이 만들어진다면 융합적인 사고를 배양할 수 있는 CRP 아이템들이 많이 개발될 수 있을 것이다.
서두에 얘기한 포스텍 졸업식에 참석한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아키바 토르 (Akiva Tor) 대사는 축사를 통하여 우주에 대한 경외심과 호기심에 바탕한 인간의 능력에 대한 낙관주의를 강조하였다. 창세기의 시작 부분은 교리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에게는 우주를 깊이 이해하고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능력과 호기심에 기반한 노력을 통해 대담한 발견을 해나가는 특성이 있다는 낙관주의를 반영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낙관주의가 '유쾌하고 재미있는' CRP 프로그램을 통하여 과학영재들에게 심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