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는 법
"If I have seen further, it is by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위대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의 이 말은, 사실 아이작 뉴턴이 처음으로 한 말은 아니다. 그가 경쟁 관계인 과학자 로버트 훅에게 보낸 편지에서 익히 알려진 말을 인용했을 뿐이다. 개인이 주고받는 편지에서 일일이 말의 출처를 밝히지 않으니, 뉴턴의 잘못은 없다. 굳이 이 말의 출처를 따져 묻는 사람은 드물고, 후세인들은 대부분 뉴턴의 어록으로 기억한다. 말의 설득력은 말 자체보다 말하는 이의 에토스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류의 지적 자산은 여전히 책으로 전승되니 시간을 초월하여 거인의 어깨 위에 서는 방법은 독서이고, 공간을 초월하여 견문을 넓히는 것은 여행이지 않을까. 나는 가끔 제자들에게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여행과 독서라고 말한다. 여행과 독서의 동기는 유사하다. 새로운 곳을 열망하고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 그 앎을 깊이 파고드는 탐구심, 이 두 가지를 지닌 사람이 거인의 어깨 위에 서서 더 멀리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이들은 우리 역사의 거인들이고, 이들의 어깨 위에 서려면 연암의 호기심과 다산의 탐구심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II. 연암의 호기심
중세의 성직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은 꼬치꼬치 따져 묻는 자들을 위해 지옥을 마련했다"고 할 만큼 중세에는 호기심을 죄악시했다. 호기심은 불온하며 권력의 입장에서 저항과 불복종의 시작일 뿐이었다. 호기심에 찬 아이가 부모의 통제를 벗어나듯 민중의 호기심은 권력자의 통제를 거부하고 경계를 벗어나기 마련이다.
중세에 배척받던 호기심은 르네상스기를 거쳐 자연과학이 발달한 근대에 이르러 다시 유익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철학에 기초한 자연과학의 눈부신 발전은 인간의 호기심 없이는 불가능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향한 뉴턴의 호기심이 만유인력을 발견하게 했고, 푸른곰팡이에 대한 플레밍의 호기심이 페니실린을 만들었다. 가깝게는 애플사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 유통기업 월마트의 창시자 샘 월튼, 디스커버리 채널의 오늘을 있게 한 존 헨드릭스 등이 세상을 바꾼 원동력도 호기심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호기심으로 유명한 인물이 연암 박지원이고, 그의 호기심 결정판이 「열하일기」다. 이 책은 연암이 청나라 건륭황제 만수절(70세 생일) 축하 사절단을 따라가 중원대륙을 둘러본 여행기이다. 1780년 음력 6월 24일, 연암은 축하사절단을 따라 압록강을 건넌다. 집 떠난 지 오래라 멀고 먼 연경행에 연암의 마음과 몸 모두 지쳐갈 즈음, 청나라 황제는 느닷없이 조선사신단을 열하로 부른다. 열하는 지역 이름으로 지금 중국 하북성 승덕이다. 청나라 황제들의 여름 별장이 있는 곳으로 뜨거운 물, 즉 온천이 많아 열하라 하였다. 다급해진 연암과 일행은 길을 재촉해야 했다. 북경에서 열하까지 230㎞를 4박 5일 밤낮없이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예정에 없던 열하행이 결정되자 연암은 머뭇거린다. 몸은 지쳤고 마음은 청나라 수도 연경에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연암은 목숨 걸고 열하행을 결심한다. 이유는 열하, 라는 조선인 누구도 가보지 않은 낯선 길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 호기심이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여행기 「열하일기」를 낳았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참된 발견은 새로운 땅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연암이 아닌 누군가가 열하로 갔다 하여도 연암과 같은 눈으로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호기심은 단순히 낯선 곳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 연암은 당대 집권세력 노론 명문가의 유망주였으나 시대의 통념과 전제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연암은 호기심으로 근대를 여는 인간으로 평가받는다.
인터넷의 발달은 겉으로는 호기심을 충족하기에 적합한 환경이다. 특히 스마트폰은 공간적 제약마저 없앴다. 하지만 검색어와 답이 있을 뿐, 그 사이의 호기심과 호기심에서 출발한 관찰과 탐구심은 사라졌다. 우리는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것을 지적 활동이라 착각한다. 인간은 알고 있는 것과 알고 싶어 하는 것 사이에 틈새가 있을 때 호기심을 느낀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하는 시대에는 그러한 틈이 없다. 알고 싶은 것이 곧 아는 것이 되는 시대, 가고 싶은 곳을 위성사진으로 볼 수 있는 시대, 우리는 더는 놀라울 것 없는 세상에 길들며 호기심과 멀어진다. 익숙함과 결별하는 것은 누구나 어렵다. 인간은 진화 단계에서 사고의 불편함을 극복하고자 스테레오타입, 즉 고정관념을 만들고 이것에 의지해 살아간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나이 드니 세상에 신기한 게 없다고. 그러니 곁에서 지켜본 할머니의 삶은 재미가 없었다. 아이들은 신기한 게 많아 끊임없이 질문해댄다. 그랬던 아이들도 자라서 어른이 되면서 왜,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묵묵히 주어진 틀에 맞추어 살아갈 뿐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결국 질문하는 법을 잊어가는 과정이며 어린 시절의 재미를 잃어가는 과정이다. 최근 연구를 보면, 궁금한 게 많은 노인이 평균적으로 오래 산다고 한다. 인생을 오래 살며 재미를 느끼고자 한다면, 끊임없는 호기심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
정조가 그토록 분노했던 '문체반정'의 주역이 연암 박지원인 이유도 연암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는 당대의 지배적 문체인 고문(古文)이 답답했다. 연암의 호기심은 문체에 대한 다양한 실험으로 이어졌고, 열하일기가 보여주듯 고문, 소품체, 소설 등 다양한 문체들을 펼쳤다.
호기심이 가득한 자는 길이 있어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는 곳을 길로 만든다. 느닷없는 호기심에 자신을 맡긴 자는 삶의 질주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치열한 도전 끝에 자신의 인생과 세상을 바꾼다. 마치 연암처럼.
III. 다산의 탐구심
「목민심서」를 비롯하여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한 다산 정약용은 학자이자 과학적 합리성을 중시한 과학기술자이기도 했다. 28살 문과에 급제한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 가기까지의 관료 생활은 11년에 불과했다. 급제 후 다산의 첫 벼슬은 '희릉직장'이었는데, 희릉은 장경왕후의 능이고 직장은 종7품 관리직이니 지금으로 보면 기술직에 해당한다. 「여유당전서」에 실린 「기예론」에서 알 수 있듯, 과학 기술에 관심이 높았던 다산은 천문학, 지리학, 역학, 수학, 광학, 의학 등 광범위한 분야를 탐구했다. 다산은 볼록 렌즈가 태양 광선을 초점에 집중시켜 물건을 태우는 원리, 흰 것보다는 검은 물건이 타기 쉬운 이유, 신기루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 나아가 암실 앞에 렌즈를 끼워 놓고 사진기 효과를 얻는 방법 등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할 만큼 과학에 대한 탐구심이 높았다. 다산은 이론에만 머물지 않았다. 도르래와 지렛대 원리를 활용한 기중가(起重架)를 개발하여 수원 화성 축조에 이바지했으며, 서울대 의대 황상익 교수의 책 「근대 의료의 풍경」에서 최초의 종두술 시술자로 정약용과 지석영을 함께 논의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다산은 당시 획기적인 의술 발전을 이끌기도 했다.
다산은 정조의 명으로 서울 노량진에 배다리를 설계하였고, 이어 화성 축조사업의 책임을 맡았다. 화성 축조는 비용이 엄청난 국가사업이었는데, 왕의 근심만 깊을 뿐, 조정의 논의는 흩어지기만 했다. 이에 다산은 성곽의 기본 설계와 축조 방법을 탐구한 「성설」을 책자로 완성하였고, 여기서 설계부터 완공까지 중요한 공정들을 상세하게 정리하여 길을 텄다. 우리나라의 성은 돌로 쌓는 석성과 흙을 다져 쌓는 토성이 있는데 조선 후기에는 대부분 석성이었다. 석성은 무거운 석재를 마련하고 운반하는 데 비용이 엄청났고, 당시 중국 문물을 경험한 북학파는 중국의 방법대로 벽돌을 구워 성을 쌓자 주장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연암 박지원이었다. 연암은 자신이 함양군수로 있을 적 직접 벽돌을 구워 건물을 세우는 시범을 보일 만큼 벽돌예찬론자였다. 연암의 호기심은 벽돌 건물 건축 시범을 보이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다산의 탐구심은 중국의 사례를 탐구하여 우리나라 사람이 벽돌을 굽는 데 능숙하지 않고, 또 벽돌을 굽는 데 드는 땔감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근거로 석성을 선택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다산은 벽돌 관련 기술과 경험이 부족한 상황에서 국책 사업에 적용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는 합리적인 판단을 한 것이다.
다산은 중국을 여행한 경험이 없었다. 다산의 대표작 「목민심서」도 책상에 앉아 쓴 책이다. 다산의 장점은 독서와 탐구심이었으며, 다른 나라의 사례를 끌어다 쓰기보다 이치를 따져 적합한 것을 선택하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하였다.
석성을 쌓자면 석재 운반이 문제였다. 다산은 중국 모원의가 정리한 「무비지」를 탐구하였다. 각종 수레의 원리와 쓰임새를 비교 검토하여 조선의 도로 사정과 쓰임에 가장 합당하면서도 경비를 절감할 수 있는 수레, 유형거를 개발했다. 당시는 수레의 바큇살이 돌의 하중을 견디지 못해 부서지는 일이 잦아, 다산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하중을 분산하는 특수 바퀴 통을 개발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우리가 익히 아는, 화성 축조에 동원된 기중가도 테렌츠의 「기기도설」의 여러 도해를 면밀히 검토하여 구리로 만든 톱니바퀴가 달린 기아 장치를 조선의 기술력으로 만들 수 없다고 판단하여 복수의 도르래를 사용하는 조선형 기중가를 개발한 것이다. 다산이 직접 기중가의 원리를 설명하는 글을 읽으면, 그가 물리학에 깊은 조예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렇듯 다산은 탐구심을 바탕으로 기존의 것을 응용하여 새로운 것을 실용적으로 창안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공사가 끝난 후 다산이 개발한 기중가 덕분에 4만 냥의 경비를 절감할 수 있어 정조가 크게 기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편, 다산은 일당제를 넘어 인부 한 사람마다 실적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는 성과급제를 제안하여 비용 절약과 공정 단축을 하였다. 50개월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공사 기간을 34개월로 앞당기는 인사 경영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다산은 경영이나 과학 기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학자였으나, 그에게는 독서를 바탕으로 한 탐구심이 있었다. 나는 문과 출신의 국문학 전공자임에도 자동차와 자전거 정비를 직접 한다. 제조회사가 제공한 책자를 숙독하고, 기계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면 정비와 수리가 어렵지 않고, 오히려 즐겁다. 처음 국내에 인터넷이 도입되었을 때, HTML 언어를 익혀 홈페이지를 제작하여 수업에 활용하였고, 이후 웹 환경에서 가상강의실을 직접 만들어 수업에 적용하였다. 주위에서 기존 홈페이지나 대학에서 제공하는 가상대학을 사용하면 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했으나, 내가 직접 원리를 알아야 수업에 따라 응용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작년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비대면 수업이 시작되어 교수들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수업 특성에 맞는 가상 게시판을 만들어 바로 적용할 수 있었다. 새로운 것을 향한 호기심과 이를 깊이 파고드는 탐구심은 문과와 이과의 구분이 없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기술이지만,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인문학이다. 토목과 건축은 공학이지만 그곳에 살고 이용하는 사람들을 이해해야 하기에 인문학과 밀접할 수밖에 없다. 다산은 인문주의자였다. 조선과 중국의 성곽을 연구했고, 공사와 관련된 수많은 서적과 자료들을 읽고 분석했다. 류성룡의 「성설」을 읽고 화성을 산성과 같이 견고한 방어시설로 계획했고, 「무비지」나 「기기도설」 등 병서와 기술서들을 섭렵하여 온갖 새로운 시설과 기구들을 발명하고 적용했다. 그가 단순히 과거의 경험을 답습하는 기술자의 수준에 머물렀다면 새로운 성곽은 구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다산은 책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현장 답사를 통해 문제를 파악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했다. 나아가 당시 조선의 기술 수준을 정확히 인식하여 가능한 방안들을 고민했다. 북학파의 '벽돌생산론'을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고, 아무리 선진 중국의 제도가 좋다고 해도 우리 현실에 맞지 않으면 수용하지 않는, 실용적 비판 정신을 지녔다.
다산은 「오학론」에서 공부의 기본을 정리했다. 널리 책을 읽어 공부하는 박학(博學)과 자세히 묻고(審問), 신중히 생각하며(愼思), 명백히 말하고(明辯), 성실히 실행하기(篤行)를 강조했는데, 이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는 힘, 아는 것을 실천하는 힘을 강조한 것이다.
호기심으로 널리 읽고, 스스로 의문을 품어 깊이 탐구하며, 그리하여 자신의 견해를 명백히 밝혀 이를 실천에 옮기는 자가 진정으로 공부하는 자이다. 앎이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깨달음과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정직함이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은 모르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면, 인간은 인공지능보다 나은 존재다. 인공지능은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는 알지만,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는 알지 못한다. 인공지능은 본디 호기심이 없으며 탐색할 뿐, 탐구하지 않는다.
IV. 연암과 다산처럼
홍문관 수찬 정약용은 저녁 숙직 자리에서 극비리에 임금 정조의 부름을 받고 어전에 나아가, 암행어사로 복명하라는 명을 받는다. 정약용은 임금의 명으로 경기도 북부 6개 고을을 암행하였는데, 이 경험이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일찍이 벼슬길에 오른 아버지 덕택으로 사또 자제로 귀하고 유복하게 자란 다산은 책 읽기를 좋아하고 풍광을 읊고 자연을 관조하는 시를 즐겨 썼다. 그런 다산이 암행어사로 잠행하며 목격한 18세기 후반 조선 농촌의 실상은 참담하고 충격적이었다. 목민관들의 부정부패와 탐관오리들의 등쌀에 피폐해진 백성들의 실상을 보면서 다산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의 권익을 위해 생애를 바칠 결심을 굳힌다.
자신이 퇴락하고 힘들 때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기는 쉽다. 하지만 홍문관 교리와 수찬을 거쳐 암행어사로 출세가도를 달릴 무렵 약자 편에 서서 다산처럼 행동하는 것은 어렵다. 만약 다산이 백성들의 피폐한 현실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더불어 다산이 문학적 감성과 공감 능력으로 백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우리가 아는 위대한 다산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을 쓰고자 연암과 다산에 관한 책을 여러 권 꼼꼼하게 읽었다. 알면 알수록 인간적으로 매력적인 인물들임을 느낀다. 연암과 다산의 호기심과 탐구심은 자신이 가는 길을 새로운 길로 만들며 위대한 업적을 일구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호기와 탐구 사이를 잇는 역할이 여행과 독서였으며 그 과정을 모두 글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 호기심과 탐구심을 바탕으로 읽고 생각하고 쓰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던 위대한 두 인물. 친구를 좋아하고, 유배지에서도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상하게 안부를 물었고, 무엇보다 당대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던 이들의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에 연암과 다산은 별처럼 빛난다. 다산이 쓴 500여 권의 책은 혼자만의 결과가 아니었다. 이는 제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가능했으며, 연암은 천성이 친구를 좋아하여 혼자 밥 먹는 법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누구라도 연암의 친구가 되었고, 그 마당발이 「열하일기」의 원천이 되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면 되지만,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 스승과 제자, 친구들과 함께 호기심과 탐구심의 여정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설 수 있다. 연암과 다산처럼.
참고도서
-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박지원 / 김풍기·길진숙·고미숙 공역, 북드라망
- 「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 박수밀, 돌베개
- 「연암평전」, 간호윤, 소명출판
- 「다산 정약용 평전」, 박석무, 민음사
- 「다산 선생 지식 경영법」, 정민, 김영사
- 「다산의 마지막 공부」, 조윤제, 청림출판
- 「정약용 사상 속의 과학기술」, 김영식, 서울대학교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