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부터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결과물을 놓고 보자면 대학원에 입학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겠지만, 행위를 놓고 보면 그보다 먼저 아르바이트로 학부생 연구 근로를 하면서이고, 동기를 놓고 보면 열유체역학이 좋아서 아르바이트로 연구 근로를 신청했을 때이다. 좋아한 것으로 따지면, 그전에 대학에 들어와 기계공학과를 택했고, 좀 더 전에 수능을 보고 공대로 진학했으며, 저 멀리는 공상과학 영상을 보고 키웠던 어릴 적 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연구, research, 어떤 일이나 사물에 대해서 깊이 있게 조사하고 생각하여 진리를 따져보는 일." 사전의 뜻을 놓고 보면, 거창할 것 없는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것인데, 그리고 예전에도 그리 어렵지 않게 상상했던 것 같은데, 지금의 필자는 어렵사리 따온 프로젝트와 실적으로 제출해야 할 논문을 쓰기 위해 연구를 하고 있다. 연구가 이렇게 무거웠었나?
과학고 학생들이 진행하는 연구과제의 컨설팅 의뢰를 받았다. '수벽(water walls)을 형성하는 방파제의 효과 탐구'라는 제목을 가진 3페이지 분량의 연구계획서와 함께. 바닷가 부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테트라포드(tetrapod)형상의 방파제는 파도의 움직임을 방해하면서 파도의 에너지를 소산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이 학생들의 제안은 이와 반대로 최대한 파도의 운동에너지를 유지하여 분수처럼 하늘로 솟구치게 유도함으로써 넘어오는 파도를 막는 수벽으로 작용시키게 한다는 아이디어였다.
모형을 사용하는 실험에서 오는 해석적 어려움이 가장 먼저 보이고, 현실의 방파제에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려가 뒤따른다. 충격량을 측정하려는 장치가 내재하고 있는 오차율에 대한 고려가 있는지 의심스럽고, 학생들이 의지를 보였던 전산해석은 능력(지식의 관점)의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판단했다. 하여 약속된 시간보다 길게 진행되었던 컨설팅이었건만, 잔뜩 걱정거리들만 늘어놓은 다소 무거운 시간이었다고 회상한다. 400만원 예산에 8개월짜리 연구가 뭐가 그리 대단해야 한다고, 실패하면 또 어떠한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마도 학생들이 필자에게 원했던 건 구상한 아이디어를 어떻게 쉽게, 의도대로 구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실제로 방파제로 쓰이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파도의 흐름을 유도해 만들어낸 물기둥으로 다른 파도를 막겠다는 생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재미있지 않았나? 무거움을 덜어내고 보니 재미있는 것들이 가득했는데, 무거움만 전달해준 것 같아서 그 점이 못내 아쉽게 다가온다.
이렇듯, 컨설팅의 아쉬움은 필자가 과학고에서 진행되는 연구의 성격에 대해 무지했던 것에 기인한다. '짧은 시간, 소규모 예산, 한정된 장비를 가지고 재미있는 아이디어에 기반한 가설 혹은 현상을 구현해보는 것'으로 컨설팅을 진행했더라면 조금 더 유익했을 것 같다. 수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소규모 연구가 갖는 자유로움에 좀 더 집중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반면, 대학에서의 연구의 성격은 조금 다르다. 첫 번째는 프로젝트의 성격이다. 공학분야 프로젝트 기반의 연구는 많은 돈과 시간이 투입되는 만큼 실제 적용할 대상이 명확해야 하고, 과정이나 분석이 정확해야 하며, 실패에 대한 페널티가 존재한다. 물론 이학분야에서 매우 자유롭게 열어주는 프로젝트도 존재하나 최소한 근 미래에 인류에게 필요한 지식임을 설득시킬 수는 있어야 한다. 과제의 성격에 따라 예산과 시간은 천차만별이나, 대학에서 작은 규모의 연구는 총연구비 1.5억원 내외에 3년의 기간을 가지고, 어느정도 규모를 갖는 연구는 총연구비 10∼15억원 내외에 5년의 기간을 가진다. 나라의 세금으로 지원되는 연구이니만큼 지적인 흥미 그 이상의 납득할만한 결과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모 아니면 도'와 같이 굉장히 실험적인 연구 주제나 방향은 실적에서 자유롭기가 힘들다. 안정적으로 가든가, 인생을 갈아 넣든가.
두 번째는 연구 인력의 성격이다. 연구책임자인 지도교수와 교수가 꾸린 연구실 소속의 대학원생 다수로 구성되며, 교수의 지도아래 실질적인 연구는 대학원생들에 의해 행해진다. 학부에서 폭넓게 여러 과목을 배우고, 대학원에서 보다 세부적으로 배우며, 연구를 통해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일련의 훈련 과정이다. 그러므로 자연법칙에 의거하여 불가능한 것을 시도한다거나, 남이 먼저 했던 연구를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비슷하게 반복한다거나, 원하는 결과 대비 잘못된 분석 방법을 사용한다거나 하는 것들이 면밀히 배제된다.
따라서, 연구는 매우 체계적이고 폭넓은 지식이 요구되는데, 기계공학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기계공학에 입문하기 전에 수학, 물리, 화학, 생명에 대한 기초를 배우고, 기계공학에 입문해서는 정역학, 동역학, 열역학, 유체, 진동, 제어, 연소, 전기, 소재, 설계 등을 배우며, 전공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수학 과목은 따로 수강해야 한다. 대학원에서는 자신의 세부전공에 따라 원하는 과목을 수강하는데, 필자는 열역학과 유체역학에 대한 과목을 집중적(13과목)으로 수강하였다. 이즈음이 되면, 연구 분야에 따라 다르겠으나, 필자의 경우 1980∼90년대의 연구까지 따라온 것이 되었다. 흔히 말하는 졸업논문의 주제 선택은 자신이 재미있게 보았던 전공 책에서 하나의 챕터를 고르고 다시 하나의 문단을 고르는 과정이다. 100여편 이상의 논문을 골라서 읽다보면 전공 책 이후 나머지 20∼30년 간 진행되어 온 연구를 따라잡을 수 있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영역을 판단할 수 있다.
하여, 컨설팅에서 필자의 첫 질문은 어디까지 공부하고 아이디어를 도출한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대학에서 연구는 여기서 시작하며 6개월에서 길게는 1년가량 시간을 할애한다. 보통은 선각자들이 개척해놓은 뼈대 위에 조금씩 더해가는 일이 안정적이고 실패할 확률이 작다. 흔히 최적화나 기능이 다양해지는 연구결과가 도출되고, 논문도 많이 나온다. 문제는 자신이 선각자가 되어야 하는 경우다. 실마리를 찾을 곳도 없고 어디가서 물어볼 사람도 없으니 많은 시행착오와 함께 긴 시간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경우는 다른 분야의 선각자들이 접근했던 방법들에서 영감을 얻는 경우가 많고, 전혀 관련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분야에서 보편적인 지식이 그토록 찾던 해결책이 되기도 한다.
필자의 연구 중 하나는 물속에 분산된 그래핀 입자가 산화도에 따라 열에 의해 가열면에 흡착될 때 다른 형상을 띄는 것에 대해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기계적 물성도 거의 흡사하고 형태도 비슷한데 2차원의 필름으로 형성되기도 하고, 3차원의 스펀지가 형성되기도 한다. 3차원 형상의 그래핀 스펀지는 슈퍼커패시터와 같은 차세대 에너지 저장분야의 전극소재로 사용될 수 있어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그래핀의 원료인 흑연에서부터, 입자의 크기, 가열 조건 등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하면서 약 2년의 시간을 소득 없이 보낸다. 엉뚱하게도, 머리를 식힐 겸 읽던 자기계발 서적에서 해답을 찾았다. 흙과 같은 입자가 퇴적할 때, 서로 밀어내는 힘이 강하면 치밀한 구조를 형성하고 반대로 서로 응집하고자 하는 힘이 강하면 성긴 구조를 형성한다는 내용이었다. 책의 저자는 반도체 공정에서 박막 증착에 대한 문제에서 위의 내용을 우연히 접하고 실마리를 얻어 문제를 해결하였다. 필자의 경우도 그랬다. 그래핀 입자는 산화도에 따라 표면에 존재하는 산화작용기의 양이 결정되는데, 물속에서 이온화되어 음의 전하를 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하량에 따라 그래핀 입자간 밀어내는 힘의 정도를 조절할 수 있음이니, 이것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었다. 전하량을 조절하기 위해 용액의 pH와 입자의 산화도를 조절하였고, 몇 가지 실험을 통해 가설을 입증했다.
연구만이 아니라 현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필자에게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되었냐고 물어본다면, 다양하게 많이 배웠던 것이라고 답하고 싶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격언이 충실히 적용되는 곳 중 하나가 이곳이다. 전혀 쓸모가 없을 것 같은 과목들, 스쳐가며 들었던 내용들에게서 불현 듯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연구를 업으로 삼겠다 하면 싫어하는 과목들 또한 언젠가는 인생에 꼭 쓰이게 된다. 필자의 경우는 화학이다. 고등학교 시절 화학 II를 배우면서 싫어하기 시작했던 과목이었고, 기계공학을 택했으니 화학은 내 인생에서 볼 수 없을 그런 학문으로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필자가 맡은 일이 그래핀을 화학적으로 합성하는 것일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소속된 연구실에서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화학공학과 연구실에 가서 배워왔다. 다행히 학부과정 때의 화학실험 경험이 머릿속에 남아있어서 관련된 장비를 구입하고 환경을 꾸리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래핀 연구는 논문을 많이 쓸 수 있게 해주었고, 현재 필자가 학교에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했다. 다른 예로, 필자가 가장 힘들어했던 연구는 연료전지에 관한 6개월짜리 단기 프로젝트였다. 꾸역꾸역 연구를 마무리하고는 앞으로 H그룹의 연구소가 있는 방향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현재 가르치는 과목 중 하나는 연료전지에 대한 내용이 충실하게 작성되어 당당하게 한 챕터를 차지하고 있다.
다시 컨설팅으로 돌아가, 아쉬웠던 점을 몇 가지 정리하고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짧은 준비시간이었다. 컨설팅 당일 2시간 전에야 학생들이 물어보길 원하는 내용을 받았으니, 준비할 시간이 없어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필자를 포함한 컨설턴트들은 굉장히 좁은 분야에서의 전문가이다. 자기 분야가 아니면 내용이 정확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서 조언해주기 굉장히 조심스러워진다. 그래도 보고 들었던 것과 물어볼 수 있는 사람들(정확히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은 많으니 하루나 이틀만 준비할 시간이 더 있었다면 충실한 컨설팅이 될 수 있을 거라 본다. 두 번째는 컨설팅이 일회성의 이벤트라는 점이다. 필자가 했던 이야기들이 정말로 되는 것인지, 아니면 어디서 막혀있는지 궁금하다. 분명히 해석이나 데이터의 수집 과정에서 어려운 점이 생길 것인데, 일찌감치 포기하거나 몇 마디 일러주면 피할 수 있는 시행착오로 시간을 보낼까 걱정스럽다. 예전에 교수님께서 해준 말씀이 있다. 나이를 먹고 보니 경험은 많은데 시간이 없어서 멋있는 일을 시작 못하고 있다고, 해서 젊은 연구자가 자신의 경험으로 아낄 수 있었을 그 시간이 아깝다고 말이다. 시행착오 또한 교육과정의 일환이겠으나, 쉽게 가든 어렵게 가든 어차피 들어가는 노력의 양은 똑같다고 생각한다. 같은 노력으로 쉽게 가면 더 멋진 결과가 나오지 않겠나? 메일 한 통이면 된다. 조언을 구하는 것에 있어서 주저함이 없으면 한다. 컨설팅비는 이미 충분히 받았으니 말이다.
서두에 적었듯, 이번 컨설팅은 필자 스스로도 연구에 대해 돌아본 계기가 되었다. 연구를 떠올리면 프로젝트가 떠오르고 써야 하는 논문이 떠오르는 무거운 것이라 여겨왔는데, 내가 흥미있어 하는 것을 알아가기만 하면 되는 가벼운 것이었다. 좋은 자극이 되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필자는 프로젝트에 묶인 몸이니, 학생들과 그들의 연구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내게 자주 주어지길 바란다.